에듀테크 프로젝트 대시보드
거란 전쟁과 고려의 전성기
고려 vs 거란(요) — 세 차례의 전쟁
993년부터 1019년까지 26년에 걸친 세 차례 침입을 물리치고 전성기를 연 시기
| 1차 침입(993) | 거란 장수 소손녕이 침입 →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확보하고 철군시킴 |
| 2차 침입(1010) |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 성종이 직접 침입 → 개경 함락, 현종이 나주까지 피난 |
| 3차 침입(1018~19) | 소배압이 이끈 대군을 강감찬이 귀주에서 크게 격파(귀주대첩) |
| 이후 | 개경에 나성을 쌓고 압록강~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해 국경 방어 체제를 완성 |
거란(遼)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력을 키운 북방 국가로, 고려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훈요십조에서 거란을 경계할 것을 명시할 만큼 거란에 적대적이었습니다. 한편 거란은 중원의 송(宋)과 대립하며 배후의 고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굴복시키려 했습니다. 즉 고려-송-거란 세 나라의 세력 균형 다툼이 거란의 3차례 침입으로 이어진 근본 배경입니다.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니 고구려 옛 땅(거란이 차지한 지역)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서희는 오히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으니 국호부터가 증거이며, 여진이 가로막아 거란과 통교하지 못했을 뿐"이라 반박하며 거란과 국교를 맺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했습니다. 이는 전쟁 없이 외교로 영토를 넓힌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목종의 뒤를 잇는 과정에서 서경도순검사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습니다. 거란은 이를 '신하가 임금을 폐한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 개경까지 함락시켰습니다.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했으나, 거란은 양규 등의 저항과 보급 문제로 결국 철군했습니다.
3차 침입 때 소배압의 거란군은 개경까지 남하했으나 함락에 실패하고 후퇴했습니다. 강감찬은 귀주(구주)에서 후퇴하는 거란군을 크게 무찔러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 승리로 거란은 이후 더 이상 대규모로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고, 고려·송·거란 사이의 세력 균형이 안정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도성 개경에 나성을 쌓고, 북쪽 국경을 따라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이어지는 천리장성을 축조했습니다. 이로써 국방 체제를 완비하고, 이후 문벌귀족 사회의 안정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993년 소손녕과의 담판으로 전쟁 없이 강동 6주를 확보한 외교의 대표 인물.
1019년 귀주대첩에서 거란 대군을 격파, 세 차례 전쟁의 마침표를 찍음.
2차 침입 때 나주까지 피난한 왕. 이후 국정을 안정시키고 3차 침입 격퇴를 이끎.
2차 침입 때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끈질기게 저항, 백성 포로들을 다수 구출함.
목종을 폐위시킨 정변의 주역. 거란의 2차 침입 명분을 제공함.
| 항목 | 내용 |
|---|---|
| 1차 침입(993) | 소손녕 침입 → 서희의 외교 담판 → 강동 6주 확보 |
| 2차 침입(1010) | 강조의 정변이 명분 → 개경 함락, 현종 나주 피난 → 양규의 활약 |
| 3차 침입(1018~19) | 소배압 침입 →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 대승 |
| 전후 정비 | 개경 나성(1029) · 천리장성(1044) 축조로 방비 체제 완성 |
| 의의 | 고려·송·거란 세력 균형 확립 → 문벌귀족 사회의 전성기로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