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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침략과 원 간섭기
몽골(원)의 침략과 약 100년의 간섭
1231년 첫 침입부터 공민왕의 반원 개혁 이전까지, 고려가 몽골의 압박 속에 놓였던 시기
| 침입 | 12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 최씨 정권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 |
| 항쟁 | 처인성·충주성 전투 등 각지 백성·천민들의 항전, 이후 삼별초가 강화·진도·제주로 옮겨가며 3년간 항쟁 |
| 강화 | 1259년 태자(훗날 원종)의 입조로 강화 성립, 1270년 개경 환도로 전쟁 공식 종료 |
| 간섭 | 정동행성·쌍성총관부 설치, 부마국 체제, 몽골풍 유행 등 약 80년간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음 |
1219년 고려는 몽골과 손잡고 거란 유민을 강동성에서 함께 토벌한 뒤(강동성 전투) 몽골과 형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몽골이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며 갈등이 쌓였고, 1225년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몽골은 이를 구실 삼아 1231년 대규모 침입을 감행했습니다.
집권자 최우는 몽골 기병이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는 약점을 노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배층의 안전은 지켰을지언정, 육지에 남겨진 백성들은 몽골군의 반복된 침입에 그대로 노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규군이 아닌 백성과 천민들이 항쟁의 주역이 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승려 김윤후가 이끈 부곡민들이 몽골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했고, 1253~54년 충주성 전투에서는 김윤후가 노비 문서를 불태워 신분 해방을 약속하며 병사와 노비들을 독려해 성을 지켜냈습니다.
개경 환도는 곧 몽골에 대한 항복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서 봉기해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고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진도가 함락된 뒤에는 김통정이 잔여 세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지속했으나,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고려는 나라를 유지했지만, 원(몽골)의 부마국(사위 나라)으로 편입되어 약 80년간 정치적 간섭을 받았습니다.
| 기구·제도 | 내용 |
|---|---|
| 정동행성 | 본래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되었으나 이후 고려 내정에 간섭하는 기구로 남음 |
| 쌍성총관부 | 화주(철령 이북) 지역에 설치된 원의 직할 통치 기구(1258~1356) |
| 동녕부·탐라총관부 | 서경·제주도에 각각 설치되었던 원의 직할 기구(이후 반환) |
| 왕실 호칭 격하 | '조·종' 대신 '왕'을 쓰고, 원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忠)' 자를 붙임(충렬왕·충선왕 등) |
| 부마국 체제 | 고려 왕이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 세자는 원에서 성장 후 귀국해 즉위 |
| 몽골풍·고려양 | 변발·호복 등 몽골 풍습이 고려에 유행(몽골풍), 반대로 고려의 복식·음식 등도 원에 전파(고려양) |
| 공녀·결혼도감 | 원의 요구로 결혼도감을 설치해 고려 여성을 공녀로 보냄 |
| 권문세족 | 원과의 관계를 배경으로 성장한 새로운 지배층, 도평의사사(도당)를 장악하며 대농장을 형성 |
이러한 왜곡된 지배 구조는 14세기 중반 공민왕의 반원 개혁이 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하고, 충주성에서는 노비까지 독려해 성을 지켜낸 항쟁의 상징.
개경 환도에 반발해 삼별초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 항쟁을 주도.
진도 함락 후 잔여 삼별초를 이끌고 제주도로 이동, 마지막까지 항쟁을 지속.
몽골과의 강화를 성립시키고 개경 환도를 단행, 이후 부마국 체제의 첫 왕이 됨.
| 항목 | 내용 |
|---|---|
| 침입 계기 | 강동성 전투(1219) → 저고여 피살(1225) → 1차 침입(1231) |
| 항전 | 강화 천도(1232) · 처인성 전투 · 충주성 전투 · 팔만대장경(1236~1251) |
| 삼별초 | 강화도 → 진도(배중손) → 제주도(김통정), 1273년 진압 |
| 원 간섭기 | 정동행성 · 쌍성총관부 · 부마국 체제 · 몽골풍 · 권문세족 성장 |
| 다음 과제 | 공민왕의 반원 개혁(다음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