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과학기술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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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5대 — 광해군

이혼 조선 제15대 (묘호 없음)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중립외교 · 폐모살제 · 인조반정으로 폐위

한눈에 보기

광해군 이혼 (光海君 李琿)

선조의 차남(서자) · 조선 제15대 임금 · 실리적 중립외교와 폭정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

1575년출생년도
1608년재위 시작
1623년재위 종료(폐위)
1641년사망년도
향년 67세(세는나이)
약 15년재위 기간
출생1575년(선조 8년) 음력 4월, 한양.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
세자 책봉1592년(선조 25년) — 임진왜란 발발 직후 18세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어 분조를 이끎
재위 시작1608년 2월 — 선조 승하 직후 34세로 즉위
재위 종료1623년 3월 —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봉
사망1641년 음력 7월,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사망
나이(향년)세는나이 67세
묘·능광해군묘,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왕릉이 아닌 '묘'로 격이 낮춰짐)
  왜 평가가 엇갈릴까?
  • 전후 복구 사업(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편찬)과 명·후금 사이의 실리적 중립외교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함
  • 반면 이복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한 '폐모살제'로 큰 비판을 받음
  • 결국 서인 세력이 일으킨 인조반정(1623)으로 폐위되어, 연산군과 함께 묘호를 받지 못한 왕으로 남음

이름과 호칭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를 받지 못한 두 왕 중 한 명입니다. '광해군'은 왕이 아니라 왕자(군) 신분으로 강등된 뒤의 호칭임을 기억하세요.

본명(휘)이혼(李琿)
세자 책봉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중 18세로 왕세자에 책봉
즉위 후 지위국왕 → (폐위 후) 광해군(光海君)으로 강봉
묘호(廟號)없음 — 폐위된 왕이라 종묘에 모셔지지 못함
기록 형태《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실록'이 아닌 '일기'로 편찬

가계도 — 이혼(광해군)을 중심으로

부모는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로 선조 편과 이어집니다. 이복형 임해군, 이복동생 영창대군과의 왕위를 둘러싼 갈등이 재위 내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선조 이연
아버지 (조선 제14대 왕)
공빈 김씨
생모 · 후궁
이혼
광해군 (본인)
폐비 유씨
왕비 · 반정 후 폐서인
1남
폐세자 이지
세자였다가 반정 후 강화도서 사사
  가계도에서 꼭 기억할 포인트
  • 이복형 임해군(적장자가 아닌 서장남)을 즉위 직후 역모 혐의로 유배 보내 죽게 함
  • 이복동생이자 선조의 유일한 적자였던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낸 뒤 살해(1614)
  •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해 경운궁(서궁)에 유폐(1618) — 이 '폐모살제'가 인조반정의 명분이 됨

생애 타임라인

1575년
출생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출생.
1592년
세자 책봉·분조 지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둘러 세자로 책봉되어, 선조를 대신해 분조를 이끌고 각지를 돌며 항전을 독려.
1608년
즉위
선조 승하 직후 34세로 즉위. 적통 논란 속에서도 대북파의 지지로 왕위에 오름.
1608~1610년
대동법 시행·동의보감 완성
공납의 폐단을 줄이기 위한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하고, 허준의 《동의보감》을 완성시킴.
1609년
임해군 처형
즉위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복형 임해군을 역모 혐의로 유배 보내 죽게 함.
1614년
영창대군 사사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보낸 뒤 살해.
1618년
인목대비 폐위·유폐
계모 인목대비를 대비 자리에서 폐하고 경운궁(서궁)에 유폐. '폐모살제'라는 비판을 받음.
1619년
사르후 전투·중립외교
명의 파병 요청에 강홍립을 파견하되 형세를 봐 후금에 투항하도록 밀명,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를 펼침.
1623년 3월
인조반정·폐위
김류·이귀 등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인조)을 옹립.
1641년
사망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겨 다니다 그곳에서 사망(향년 67세).

주요 사건 (사건별 정리)

① 전후 복구와 개혁 정책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공납의 폐단을 줄이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했고, 허준에게 명해 의학서 《동의보감》을 완성시켰습니다. 전란으로 소실된 창덕궁 등 궁궐 중건도 추진했습니다.

② 폐모살제 — 왕권 강화를 위한 옥사

즉위 초 적통 논란을 의식해 이복형 임해군과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잇달아 제거했고, 계모 인목대비마저 폐위해 유폐했습니다. 이러한 '폐모살제'는 유교 윤리를 저버렸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의 핵심 근거가 되었습니다.

③ 실리적 중립외교

명이 쇠퇴하고 후금(훗날 청)이 부상하는 정세 속에서, 명의 파병 요청에 응하면서도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대처하라는 밀명을 내려 사르후 전투 패배 후 후금에 투항하게 하는 등,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④ 인조반정과 폐위 (1623)

폐모살제에 대한 반발과 대북파의 독주에 위기감을 느낀 서인 세력이 김류·이귀·이괄 등을 중심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인조)을 새 왕으로 옹립했습니다.

  시험 포인트
  • 광해군은 연산군과 함께 묘호가 없는 두 왕 중 하나이며, 기록도 '일기'로 남았다는 점 기억하기
  • 대동법 시행·동의보감 편찬 등 내치의 성과와 폐모살제 등 정치적 과오가 함께 평가된다는 점 구분하기
  • 명·후금 사이의 중립외교는 광해군 대의 대표적 외교 정책으로, 이후 인조 대의 친명배금 정책과 대비해서 기억하기
  • 인조반정(1623)의 주도 세력(서인: 김류·이귀·이괄)과 그 결과(인조 즉위)를 기억하기

주요 인물

이이첨
대북파 영수

광해군 대 정국을 주도한 대북파의 핵심 인물로, 폐모살제 논의를 이끔.

허준
어의

광해군의 명으로 의학서 《동의보감》을 완성시킴.

강홍립
도원수

사르후 전투에 파견되어 밀명에 따라 후금에 투항, 중립외교를 실행한 인물.

인목대비 김씨
계모 · 폐위·유폐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서궁에 유폐되었으며, 인조반정 후 복권됨.

김류 · 이귀 · 이괄
인조반정 주도

서인 세력을 이끌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옹립.

시험 대비 한 장 요약

항목내용
이름이혼(李琿) · 폐위 후 광해군으로 강봉 · 묘호 없음
출생~사망1575년 ~ 1641년 (향년 67세)
재위 기간1608년 ~ 1623년 (약 15년), 반정으로 폐위
결정적 사건즉위(1608) → 대동법·동의보감(1608~10) → 임해군 처형(1609) → 영창대군 사사(1614) → 인목대비 유폐(1618) → 중립외교(1619) → 인조반정(1623)
가족폐비 유씨(1남, 폐세자 이지 — 반정 후 사사) · 생모 공빈 김씨
후계인조(16대, 선조의 손자 능양군)
"실리를 좇은 외교는 후대의 재평가를 받았지만, 당대의 명분은 지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