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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3대 왕
태종 이방원 (太宗 李芳遠)
태조의 다섯째 아들 · 조선 제3대 국왕 · 조선 왕권의 기틀을 다진 군주
| 출생 | 1367년(고려 공민왕 16년) 음력 5월 16일, 함경도 함흥.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
| 재위 시작 | 1400년 11월 13일 — 형 정종으로부터 양위받아 즉위 |
| 재위 종료 | 1418년 8월 10일 —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양위 |
| 사망 | 1422년 음력 5월 10일, 세종 4년에 승하(상왕으로서 군권은 계속 보유하다 사망) |
| 나이(향년) | 세는나이 56세 — 즉위 당시는 만 33세 |
| 능 | 헌릉(獻陵),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
아버지 태조, 형 정종과 달리 태종은 즉위 후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이방원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조선 왕자 중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라는 점도 자주 출제됩니다.
| 본명(휘) | 이방원(李芳遠) |
| 자(字) | 유덕(遺德) |
| 봉작 | 정안군(靖安君) → 왕세제(王世弟) → 국왕 |
| 묘호(廟號) | 태종(太宗) |
| 시호(諡號) | 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흔히 태종 공정대왕으로 불림 |
부모는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로 태조 편과 동일합니다. 정비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 훗날의 세종입니다.
아버지 태조가 막내 왕비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방원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석·방번과 정도전을 제거했습니다. 이후 형 방간과의 제2차 왕자의 난(1400)에서도 승리하며 실질적인 후계자 지위를 확정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형 정종을 거쳐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고려식 최고 정무 기구였던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했으며,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사간원을 독립시켰습니다. 정종 때 개경으로 되돌아갔던 도읍도 1405년 다시 한양으로 확정 지었습니다.
왕비 원경왕후의 동생들인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세자(양녕대군)를 등에 업고 권력을 키우려 한다는 의심을 받자, 태종은 이들을 비롯한 처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외척의 힘을 미리 꺾어 놓은 대표적 사례입니다.
전국 백성에게 신분증에 해당하는 호패를 지니게 하여 인구와 세금, 군역 자원을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또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이 6조(이·호·예·병·형·공조)를 직접 지휘하는 6조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크게 강화했습니다.
세자였던 맏아들 양녕대군이 학문보다 사냥과 풍류를 즐기는 등 왕의 재목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자, 태종은 그를 폐세자하고 학문에 뛰어났던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세운 뒤 곧바로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왕위에서는 물러났지만 상왕으로서 군사권을 쥐고 있던 태종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지시했습니다(이종무 지휘). 세종 즉위 초 왕권 안정을 뒷받침한 대표적 사례로 꼽힙니다.
태종의 정비로 세종을 비롯한 4남 4녀를 낳음. 친정 형제들이 태종에 의해 숙청되는 아픔을 겪음.
학문에 뛰어나 형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
원래 세자였으나 자유분방한 행실로 폐세자되어 동생 충녕대군에게 자리를 넘겨줌.
원경왕후의 동생들로 권세가 커지자 태종에 의해 역모 혐의로 숙청됨.
태종의 핵심 책사로 관제 개편과 한양 재천도 등 주요 국정을 함께 설계.
1419년 대마도 정벌(기해동정)을 지휘한 장수.
| 항목 | 내용 |
|---|---|
| 이름 | 이방원 / 묘호 태종 / 조선 왕자 중 유일한 문과 급제자 |
| 출생~사망 | 1367년 ~ 1422년 (향년 56세) |
| 재위 기간 | 1400년 ~ 1418년 (약 18년), 이후 상왕으로 군권 유지 |
| 결정적 사건 | 1·2차 왕자의 난 → 즉위 → 외척 숙청 → 호패법·6조직계제 → 양녕대군 폐세자·세종 즉위 → 대마도 정벌 |
| 가족 | 정비 원경왕후 민씨(4남 4녀) · 후궁 다수(서자·서녀 다수) |
| 후계 | 세종(4대, 셋째 아들 충녕대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