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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 연산군
연산군 이융 (燕山君 李㦕)
성종의 장남 · 조선 제10대 임금 ·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를 받지 못한 왕
| 출생 | 1476년(성종 7년) 음력 11월, 한양. 성종과 왕비 윤씨(훗날 폐비 윤씨)의 장남 |
| 재위 시작 | 1494년 12월 — 성종 승하 직후 19세로 즉위 |
| 재위 종료 | 1506년 9월 —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연산군으로 강봉 |
| 사망 | 1506년 음력 11월, 유배지인 강화도 교동에서 병으로 사망 |
| 나이(향년) | 세는나이 31세 |
| 묘·능 | 연산군묘,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왕릉이 아닌 '묘'로 격이 낮춰짐) |
연산군은 조선 왕 중 연산군·광해군과 함께 반정으로 폐위되어 묘호를 받지 못한 몇 안 되는 인물입니다. '연산군'은 왕이 아니라 왕자(군) 신분의 호칭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 본명(휘) | 이융(李㦕) |
| 세자 책봉 | 1483년(성종 14년), 8세에 왕세자로 책봉 |
| 즉위 후 지위 | 국왕 → (폐위 후)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 |
| 묘호(廟號) | 없음 — 폐위된 왕이라 종묘에 모셔지지 못함 |
| 기록 형태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실록'이 아닌 '일기'로 편찬 |
부모는 성종과 폐비 윤씨로 성종 편과 동일합니다. 연산군은 3세 때 어머니가 폐출되는 것을 겪었고, 성인이 되어 그 경위를 알게 된 것이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사관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발각되자, 훈구파 유자광·이극돈 등이 이를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 몰아 사림파 인사들을 대거 숙청했습니다. 조선 최초의 대규모 사화입니다.
임사홍의 밀고로 생모 폐비 윤씨의 폐출·사사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이에 관련된 훈구파와 사림파 인사들을 가리지 않고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이미 사망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를 당했습니다. 무오사화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잔혹한 숙청이었습니다.
왕을 비판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한글 사용을 탄압했고, 사간원·홍문관 등 신하들이 간언할 수 있는 언론 기관을 없애거나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왕에 대한 견제를 봉쇄했습니다.
전국에서 미녀와 좋은 말을 선발해 흥청(興淸)이라 부르며 향락에 탐닉했고, 백성의 집을 헐어 사냥터를 넓히는 등 국고를 탕진했습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계속되는 폭정과 숙청에 반발한 신하들이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을 중심으로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새 왕(중종)으로 옹립했습니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된 뒤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폐비 윤씨 사사의 경위를 연산군에게 알려 갑자사화를 촉발시킨 인물.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신분이 급상승했고, 국정 문란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전해짐.
조의제문 사초 기록이 발단이 되어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는 무오사화의 중심 인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반정의 핵심 인물들.
중종반정으로 옹립되어 연산군의 뒤를 이어 즉위.
| 항목 | 내용 |
|---|---|
| 이름 | 이융(李㦕) · 폐위 후 연산군으로 강봉 · 묘호 없음 |
| 출생~사망 | 1476년 ~ 1506년 (향년 31세) |
| 재위 기간 | 1494년 ~ 1506년 (약 12년), 반정으로 폐위 |
| 결정적 사건 | 무오사화(1498) → 갑자사화(1504) → 언론 탄압·향락(1504~06) → 중종반정·폐위(1506) |
| 가족 | 폐비 신씨(세자 등 다수, 반정 후 대부분 사사) · 후궁 장녹수 등 |
| 후계 | 중종(11대, 이복동생 진성대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