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과학기술고등학교

에듀테크 프로젝트 대시보드

조선 제21대 왕

이금 조선 제21대 왕 묘호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탕평책 · 균역법 · 임오화변

한눈에 보기

영조 이금 (英祖 李昑)

숙종의 넷째 아들 · 경종의 이복동생 · 조선 역대 최장 재위·최장수를 기록한 제21대 국왕

1694년출생년도
1724년재위 시작
1776년재위 종료(승하)
1776년사망년도
향년 83세(세는나이)
약 52년재위 기간
출생1694년(숙종 20년) 음력 9월, 한양.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에 봉해짐
왕세제 책봉1721년(경종 1년) — 경종이 후사가 없자 노론의 강요로 왕세제가 됨
재위 시작1724년 8월 — 경종 승하 직후 31세로 즉위
재위 종료1776년 3월 — 재위한 채로 승하
사망1776년 음력 3월 5일, 경희궁에서 승하
나이(향년)세는나이 83세 — 조선 역대 왕 중 최장수
능원릉(元陵),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왜 '탕평의 왕'이자 '비극의 아버지'로 기억될까?
  • 즉위 초부터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며 정통성 시비를 겪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을 국정 기조로 삼음
  • 노론·소론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등용하며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워 원칙을 천명
  • 백성의 군포 부담을 절반으로 줄인 균역법(1750) 등 실질적인 민생 개혁을 이룸
  • 그러나 말년에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임오화변(1762)이라는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을 남김

이름과 호칭

영조는 세자가 아닌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어 즉위한 특이한 사례입니다. 형 경종에게 후사가 없어 동생 신분으로 다음 왕위를 예약한 경우로, 이 과정 자체가 노론·소론 간 극심한 갈등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본명(휘)이금(李昑)
봉작연잉군(延礽君) → 왕세제(1721) → 국왕
묘호(廟號)영조(英祖)
시호(諡號)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가계도 — 이금(영조)을 중심으로

부모는 숙종과 후궁 숙빈 최씨로 숙종 편과 이어지며, 희빈 장씨 소생인 경종의 이복동생입니다. 큰아들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마저 비극적으로 잃은 뒤 손자인 정조가 왕위를 이었습니다.

숙종 이순
아버지 (조선 제19대 왕)
숙빈 최씨
어머니 · 후궁
이금
영조 (본인)
정성왕후 서씨
초비
정순왕후 김씨
계비 · 51세 연하
정빈 이씨
후궁
효장세자
세자였으나 10세에 요절
영빈 이씨
후궁
사도세자
세자 · 임오화변으로 사망
이산(정조)
사도세자의 아들 ·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 → 22대 왕
  가계도에서 꼭 기억할 포인트
  • 두 왕비(정성왕후·정순왕후) 모두 소생이 없어, 왕위는 후궁 소생의 아들들에게 이어짐
  • 맏아들 효장세자가 10세에 요절한 뒤, 둘째 아들 사도세자가 세자가 되었으나 임오화변으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
  •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얻기 위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뒤 즉위

생애 타임라인

1694년
출생
숙종과 무수리 출신 후궁 숙빈 최씨의 아들로 출생, 연잉군에 봉해짐.
1721년
왕세제 책봉
이복형 경종이 후사가 없자 노론의 강요로 왕세제가 됨. 곧이어 벌어진 신임사화로 지지 세력인 노론 4대신이 대거 숙청되는 것을 지켜봄.
1724년
즉위
경종 승하 직후 31세로 즉위. 즉위 초부터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며 정통성 시비를 겪음.
1728년
이인좌의 난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됨.
1742년
탕평비 건립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워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원칙을 천명.
1750년
균역법 시행
백성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킴.
1762년
임오화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함. 붕당 갈등, 세자의 비행 논란, 부자간 불화가 얽힌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
1776년
승하
재위 52년 만에 승하(향년 83세, 조선 역대 왕 중 최장수). 손자 정조가 왕위를 이음.

주요 사건 (사건별 정리)

① 경종 독살설과 정통성 위기

영조는 즉위 전 왕세제 시절 형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올린 일이 있었는데, 얼마 뒤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독살설에 휘말렸습니다. 이 소문은 재위 내내 정통성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② 탕평책과 탕평비 (1742)

붕당 간 대립이 왕권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영조는 노론·소론을 가리지 않고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국정 기조로 삼았습니다. 1742년에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두루 사귀되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심'이라는 원칙을 새겨 넣었습니다.

③ 균역법 (1750)

양인 장정에게 부과되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절반 줄이는 균역법을 시행했습니다. 부족해진 재정은 어염세·선박세 등으로 보충해, 백성의 부담을 크게 덜어준 대표적 민생 개혁으로 평가받습니다.

④ 임오화변 (1762)

세자 시절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사도세자의 행실을 둘러싼 논란과 노론·소론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겹치면서, 영조는 결국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손자 정조의 왕위 계승 정통성 문제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시험 포인트
  • 영조는 세자가 아닌 왕세제로 책봉되어 즉위했다는 점, 그 배경의 경종 독살설을 탕평책 추진 이유와 연결해서 기억하기
  • 탕평책·탕평비(1742)를 붕당정치를 완화하려는 시도로 정조의 탕평책과 이어서 기억하기
  • 균역법(2필→1필, 1750)을 숙종 이전의 군역 폐단 및 이후 세도정치기 삼정 문란과 비교해서 정리하기
  • 임오화변(1762)의 결과로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했다는 점을 다음 대와 연결하기

주요 인물

경종
이복형 · 20대 왕

후사 없이 승하해 영조가 왕세제로서 왕위를 잇게 된 배경이 됨.

사도세자
아들 · 임오화변 희생자

세자로서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서다 뒤주에 갇혀 사망.

영빈 이씨
후궁 · 사도세자의 생모

임오화변 당시 아들의 비행을 영조에게 직접 고했다고 전해짐.

탕평파 신료들
탕평책 협력 세력

노론·소론을 가리지 않고 등용되어 탕평 정국을 뒷받침함.

정조
손자 · 22대 왕

사도세자의 아들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정통성을 갖추고 즉위.

시험 대비 한 장 요약

항목내용
이름이금(李昑) · 봉작 연잉군 · 묘호 영조
출생~사망1694년 ~ 1776년 (향년 83세, 조선 역대 최장수)
재위 기간1724년 ~ 1776년 (약 52년, 조선 역대 최장 재위)
결정적 사건왕세제 책봉·신임사화(1721) → 즉위(1724) → 이인좌의 난(1728) → 탕평비(1742) → 균역법(1750) → 임오화변(1762)
가족정성왕후·정순왕후(소생 없음) · 정빈 이씨(효장세자, 요절) · 영빈 이씨(사도세자)
후계정조(22대, 사도세자의 아들 ·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
"가장 오래 다스렸으나, 가장 아픈 선택으로 기억되다"